언론속의 공간미술
"새 이순신 장군 동상, 강도8 지진에도 끄떡없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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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말에 40여 일 동안 ‘외출’했던 서울 광화문의 이순신 장군 동상이 다시금 늠름한 모습으로 우리 앞에 섰다. 보수공사를 맡아 진행한 곳은 경기 이천시 설성면에 자리한 공간미술이었다. 광화문 세종대왕 동상을 제작해 주목받은 그 업체이기도 하다.
공간미술을 이끄는 박상규(46) 대표는 중학생 때 인연을 맺은 주물과 반평생을 함께해 온 장인이다. 한국 으뜸의 조형물 제작ㆍ보수ㆍ복원 업체로 성장하기까지 여러 차례 고비가 있었지만 그럴수록 그의 열정은 더욱 뜨거워져 갔다.
주물공장을 놀이터 삼은 어린 시절
그의 중학교 시절은 남달랐다. 친구들이 학교 운동장에서 공을 찰 때 그는 주물공장을 놀이터 삼아 놀았다.
“사촌형이 주물 및 청동을 이용해 작품 제작을 하는 사업을 했다. 사촌형을 많이 따랐던 터라 자주 그곳을 찾다 보니 자연스레 작업과정을 눈으로 익히게 됐다. 작품 제작을 위해 그곳을 방문하는 미대 학생들을 ‘형’이라고 부르며 졸졸 따라다녔던 기억이 남아 있는데, 그 형들이 지금은 유명한 미대 교수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흥미를 느끼는 분야를 재능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그는 순천공고로 진학했다. 졸업 직후 비철금속업체에 취직해 일을 배우던 그는 1990년에 사촌형의 부름을 받았다.
“‘힘을 모아 본격적으로 주물 작품에 전력해보자’는 이야기를 건네왔다. 내가 다른 곳에서 일할 때도 한두 달 휴가를 내 형과 함께 작업을 했으니 사정을 잘 알고 있는 터였다. 주물사업이 낙후화하는 감이 없지 않았는데, 함께 힘을 모으면 조형전문업체로 큰 성장을 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어 주저없이 그러겠노라 했다.”
대형 작품 제작에도 무리가 없도록 포크레인을 직접 구입해 작업공간을 확보하고 철근을 손쉽게 휠 수 있는 기계 등 당시 최신 장비를 모두 새로 갖췄다. 두 사람이 힘을 모으니 시너지가 났고 업체는 성장가도를 달렸다.
“즐거운 나날이었다. 조형 전문 스쿨을 만들 계획으로 사업도 진행했고, 내가 성장하는 만큼 업체가 발전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도 좋았다.”
인생사 흥진비래(興盡悲來)였다. 그에게 절망이 찾아왔다. 사촌형이 불의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등졌다. 모든 계획이 하루아침에 무산되고 한숨만 깊어졌다. 그렇게 4년여를 고통 속에서 지내던 그는 2000년에 공간미술 창업을 통해 제2의 인생을 시작했다.
공간미술로 제2의 인생 시작
“어린 시절 따라다녔던 교수님들이 많은 격려와 응원의 말씀을 해주셔서 힘을 얻었다. 아내와 둘이 김포로 터를 옮겨 그곳에서 조그맣게 다시 사업을 시작했다. 노하우 외에는 가진 게 없었기에 바닥부터 다시 시작하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2년을 하루 3~4시간만 자며 작업에만 몰두했다. 기회가 찾아왔다. 그를 전폭적으로 지지하는 지인을 만나게 됐고, 2000평 부지에 12m 높이의 가건물을 짓고 하고 싶은 작업을 마음껏 할 수 있게 됐다.
“‘5년 안에 1위 업체로 성장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최고가 되겠다는 목표가 있으니 못할 일이 없었다. 가건물 한쪽에 전기장판 하나 깔아놓고 쪽잠을 자며 연구와 작품활동에 매달리는 생활을 지속했다. 어느새 공간미술을 믿고 찾는 이들이 정말 많아졌다.”
김포에서 기반을 잡기 위해 몇 억원을 쏟아부었지만 2004년 다시 한번 위기가 닥쳤다. 신도시 개발로 이전이 불가피한 상황이 됐다. 그렇지만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이천시 이전을 제안받은 그는 부지를 더욱 확장, 지금 공간미술이 있는 이천시 설성면에 자리를 잡았다.
“조병돈 이천시장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공장 이전을 하며 부지를 조성함에 있어서 도로 확장 등 신경을 써줘 감사의 표시로 이천의 쌀을 형상화한 ‘명덕의 문’을 제작해 설성면에 기증했다(웃음).”
세종대왕ㆍ이순신 장군도 그의 손끝에서
고생을 다했을까. 2008년 이후 그의 작업은 더욱 활기를 띠게 됐다. 38m로 한국에서 가장 큰 동상인 전남 완도군의 장보고 동상을 제작했고 2009년엔 세종대왕 동상을 맡아 작업했다. 세종대왕 동상의 경우 현존하는 동상 중 청동의 배합 등 기술력이 가장 우수하다는 평을 받고 있다. 공간미술의 뛰어난 기술성은 최근 이순신 장군 동상 보수작업에까지 연결됐다.
“동상을 가져와 정밀진단한 결과 기존에 생각했던 것보다 해야 할 작업이 많았다. 참고할 만한 기록도 없었고…. 동상을 제작할 당시인 1968년의 기술력으로는 최선의 선택이었겠지만 어려웠던 나라살림 탓이었는지 청동의 양이 상당히 부족한 것을 알 수 있었다. 특히 6가지 정도로 합금이 많이 돼 있었는데, 거무튀튀했던 칠을 벗기고 나니 합금 비율이 일정치 않아 여러 부위가 얼룩덜룩한 모습이었다.”
보수공사를 마치고 난 이순신 장군은 건강해 보이는 외관만큼이나 튼실한 몸을 갖게 됐다.
“내부에 원래 있던 녹슬고 약한 철심을 들어내고 강력한 스테인리스 재질 보강재를 박아 넣었다. 강도 8의 지진과 초속 38m의 태풍에도 견딜 수 있을 만큼 강력해 웬만한 외부 충격에는 흔들리지 않고 굳건히 서 있을 수 있다.”
기초분야에 더욱 관심 가져야
공간미술 직원은 40여 명에 이른다. 평범한 주물공장이 5명 내외 직원으로 운영되는 것에 비하면 상당한 규모다. 그는 의뢰받은 작품을 제작하는 것 외에 디자이너를 두고 창작 조형물도 제작하고 있다.
“사실 훌륭한 디자인도 중요하고 우리도 디자인 작업을 하고 있긴 하지만 그 바탕엔 우리 같은 기초업체가 바탕이 돼 있다는 사실을 알아줬으면 한다. 비용을 좀 줄일 수 있다는 이유로 한국 작가가 디자인한 작품을 중국에 가서 만들어 오는 경우가 있는데, 그럴 때마다 정말 답답한 마음에 한숨만 나온다. 그 작품이 온전히 한국 작품이라 할 수 있겠나? 디자인이나 작가 배출 등 우리 문화를 더 키우고 해외에 널리 알리기 위해서는 기초분야에 관심을 갖고 인정하는 풍토가 하루빨리 자리 잡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현재 안성에 한국 조형작가와 화가 등 200여 명 작가의 개인 부스가 갖춰진 갤러리숲을 조성하고 있다.
“가능성 있는 작가들을 발굴해 훌륭한 작품을 해외에 널리 알렸으면 하는 바람에서 시작하게 된 일이다. ‘공간미술’이라는 상호답게 어느 공간에서든, 그 누구든 아름다운 조형예술을 감상할 수 있게끔 하고 싶다.”
이천=글ㆍ홍연정기자 hong@ 사진ㆍ안윤수기자 ays77@






